20261102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고린도후서 1:12~22] 양승언 목사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11월 2일(월) 매일성경 큐티 _ 양승언 목사
고린도후서 1장 12~22절
바울의 자랑 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13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14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계획 변경에 대한 해명 15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신실하신 하나님 18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묵상하기
1.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서, 특히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태도로 행했다고 말하는가? 그가 무엇을 자랑이라고 하는가? (12~14절)
2. 바울은 방문 계획이 바뀐 일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는가? 그는 자신의 말이 변덕스럽지 않은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가? (15~20절)
3.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바울의 고백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4. 내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는가? 언제나 “예”가 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오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무엇인가?
길잡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답한다. 바울은 본래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에 가겠다고 했다가(고전 16:5~7), 고린도에 먼저 들렀다가 마게도냐에 다녀온 뒤 다시 고린도를 거쳐 유대로 가겠다고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계획마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를 고통스럽게 방문한 뒤(2:1), 바울은 다시 가는 대신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냈다(2:3~4). 그러자 바울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 일을 빌미 삼아, 바울은 말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니 그가 전한 복음도 믿을 수 없다고 공격했다. 바울은 이 공격 앞에서 자신의 진실함을 변호하면서, 결국 시선을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 옮긴다.
· 바울의 자랑(12~14절)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서, 특히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했다고 말한다. ‘진실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일리크리네이아’는 흔히 ‘햇빛에 비추어 판별된’ 순수함을 뜻하는 말로 설명된다. 빛에 비추어 보아도 숨은 흠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람의 꾀와 처세술, 곧 “육체의 지혜”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 자신의 양심을 내세운다. 바울의 자랑은 성공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양심이었다. 바울은 편지에 숨은 뜻이나 이중적인 의도가 없다고 말한다. 그가 쓴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읽고 아는 것” 그대로다. 지금은 그들이 바울을 “부분적으로” 알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기준은 “우리 주 예수의 날”, 곧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날이다. 그날에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자랑이 되고, 바울은 그들의 자랑이 될 것이다. 바울은 지금의 오해와 갈등을 넘어,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서로를 자랑으로 여기게 될 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 계획 변경에 대한 해명(15~17절)
바울은 고린도를 두 번 방문하여 그들이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고 계획했다.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한 번, 돌아오는 길에 또 한 번 고린도에 들르고, 고린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유대로 가려 한 것이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모으고 있었고(고전 16:1~4), 그 일에 고린도 교회가 함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계획이 바뀌자, 반대자들은 바울이 “경솔히” 계획을 세운다고 비난했다. ‘경솔함’은 ‘가벼움’이라는 뜻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말을 바꾸는 태도를 가리킨다. 또 바울이 “육체를 따라”, 곧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한 입으로 “예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라 아니라” 한다고 공격했다. 바울은 이러한 비난을 단호하게 부인한다. 계획이 바뀐 것은 변덕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다(1:23).
· 신실하신 하나님(18~22절)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는 엄숙한 맹세와 같은 표현이다. 바울이 전한 말이 믿을 만한 이유는 바울 자신의 성품 때문이 아니라, 그 말씀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행 18:5).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했다가 “아니라”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 안에는 오직 “예”만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약속, 다윗의 왕위에 대한 약속, 새 언약의 약속 등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대답이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멘” 하고 응답한다. ‘아멘’은 ‘확실하다, 견고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나온 말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에서 기도와 감사에 “아멘”으로 함께 응답했다(고전 14:16).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응답이 만나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진다.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21~22절) 바울은 신자의 삶을 붙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네 가지 동사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신다. 이 말은 당시 상거래에서 계약이 유효함을 보증하고 확정할 때 쓰던 법률 용어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하나님이 그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사명을 위해 기름을 부으셨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치셨다.” 인을 치는 것은 소유권을 표시하고 진품임을 보증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사람들이다. 넷째, 하나님은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 ‘보증’으로 번역된 ‘아라본’은 물건값의 일부를 미리 치르는 계약금, 선금을 뜻한다. 계약금은 나머지도 반드시 치르겠다는 약속이다. 지금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장차 받을 온전한 구원과 영광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보증이다. 이 짧은 두 절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 함께 나타난다. 우리 신앙의 확실성은 우리의 굳은 결심에서 오지 않는다. 언제나 “예”가 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붙드시고,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하시기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삶에서도 “예”와 “아니라”가 분명한 사람으로 빚어져 간다.
기도
인간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시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삶속으로
존 뉴턴은 원래는 노예상인이었다. 노예를 사고파는 인간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될 일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탄 배가 풍랑에 좌초될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 때 하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된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노예해방을 위해 앞장서 일했다. 당시 노예매매는 영국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노예제 폐지 운동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위협도 당하고 협박도 받고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러다가 노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더이상 사역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이제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럼 왜 그는 이렇게 열심을 냈을까요? 그는 노예 상인이었던 자신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인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결코 쉴 수 없었다고 답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의 모습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내면에서 깊은 감격과 감사가 넘치며 어떤 상황에서도 충성되게 일한다. 우리도 은혜를 아는 자들이 되길 소망해 본다.
아침묵상 영상으로 이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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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6Ag0ais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