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3 [눈물로 쓴 편지, 고린도후서 1:23~2:17] 양승언 목사
눈물로 쓴 편지
11월 3일(화) 매일성경 큐티 _ 양승언 목사
고린도후서 1장 23절~2장 17절
방문을 연기한 이유 23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24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1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할 이유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그리스도의 향기 12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안에서 말하노라
묵상하기
1.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고 눈물로 편지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 편지에 어떤 마음을 담았다고 말하는가? (1:23~2:4)
2. 바울은 교회를 근심하게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면하는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5~11)
3.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고백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2:15)
4. 우리의 존재와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가? 오늘 내가 머무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길잡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아픈 일들을 털어놓는다.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했다가 교회 안의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았고, 이후 약속했던 재방문 대신 눈물로 쓴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에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몰라 애태우며 디도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근심과 눈물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교회에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렬에 참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방문을 연기한 이유(23~4절)
바울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라는 엄숙한 맹세로 말문을 연다. 그가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변덕 때문이 아니라 “너희를 아끼려” 함이었다. 만약 그때 고린도에 갔다면, 바울은 사도로서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고 징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3:2 참조). 바울은 그런 방문으로 교회에 또다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주관하다’는 주인처럼 지배하고 군림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성도들의 믿음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믿음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이며, 지도자는 그들의 기쁨을 함께 일구는 동역자일 뿐이다. 바울은 이미 한 번 고린도를 ‘근심 중에’ 방문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방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바울에게 고린도 성도들은 기쁨의 이유였다. 그들을 근심하게 하면 자신을 기쁘게 할 사람도 사라진다. 그래서 그는 방문 대신 “큰 눌림과 걱정”으로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어떤 편지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린도전서가 아니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별도의 편지로 본다. 그 편지는 아마 엄한 책망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목적이 그들을 근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참된 책망은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으로 끝난다.
· 용서하고 위로해야 할 이유(5~11절)
바울은 교회를 “근심하게 한 자”를 언급한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바울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음행으로 징계받은 사람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공개적으로 바울을 모욕하고 그의 권위에 맞섰던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바울은 그 일이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상처를 주었다고 말하면서도, 지나치게 말하지 않으려고 표현을 절제한다. 상처 준 사람을 끝까지 배려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 사람을 다수의 결정으로 징계했다. 바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때다. 징계의 목적은 처벌 자체가 아니라 회복이다. 바울은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한다. ‘잠기다’는 원문에서 ‘삼켜지다’라는 뜻으로, 지나친 근심과 수치가 사람을 통째로 삼켜 버릴 수 있다는 경고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 권한다. ‘나타내라’는 공적으로 확정하라는 뜻을 담은 말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그를 다시 받아들이고 사랑을 확인해 주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가 용서하는 사람을 자신도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다. 용서는 개인의 감정 처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의 용서를 따라 행하는 일이다. 바울이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다. ‘속지 않게’라는 말은 ‘이용당하지 않게’, ‘빼앗기지 않게’라는 뜻이다. 사탄은 죄를 짓게 하여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게 하여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정죄와 냉대로 한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이 사탄의 계책이다. 용서는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는 영적 전쟁이다.
· 그리스도의 향기(12~17절)
드로아는 소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 북서쪽 해안의 항구 도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그곳에 갔고, 주님이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다. 그러나 그는 그 기회를 뒤로하고 마게도냐로 떠난다.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오기로 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눈물의 편지에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몰라 견딜 수 없었다. 위대한 사도의 마음에도 이렇게 불안과 염려가 있었다. 그만큼 그는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다. 이 이야기는 7장 5~7절에서 다시 이어지는데,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바울은 불안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감사의 찬송을 터뜨린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이기게 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로마의 개선 행렬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로마로 돌아오면, 장군을 선두로 병사들과 전리품, 사로잡힌 포로들이 거리를 행진했고, 행렬을 따라 향을 피웠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개선장군으로, 자신을 그 행렬에 참여한 자로 그린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포로로 표현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삶이 겉으로는 실패와 눈물처럼 보여도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렬 안에 있다는 고백이다. 그 행렬을 통해 하나님은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퍼뜨리신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한다. ‘향기’는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기쁘게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엡 5:2). 그런데 같은 향기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개선 행렬의 향 냄새가 승리한 자들에게는 기쁨의 냄새였지만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죽음의 냄새였던 것처럼,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요,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탄식한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걸린 이 일을 감당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3:5~6).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 ‘혼잡하게 하다’는 행상하는 장사꾼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당시 일부 포도주 장사꾼들이 포도주에 물을 타서 팔듯, 이익을 위해 말씀에 이것저것을 섞어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한다. 이 ‘순전함’은 1장 12절의 ‘진실함’과 같은 말로, 빛에 비추어도 숨길 것 없는 투명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꾸며 낸 향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기도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고 위로하게 하시며,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게 하소서.
삶속으로
한 유능한 젊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대형 콘서트홀에서 일생일대의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가 끝나자 수천 명의 관객이 일어서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젊은 연주자는 기뻐하는 기색 없이 무대 위에서 얼굴이 어두워진 채 2층 객석의 한 구석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동료가 물었다. "그렇게 엄청난 갈채를 받았는데 왜 기뻐하지 않고 2층을 보고 있었나?" 연주자가 대답했다.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를 쳤지만, 2층 끝자리에 앉아 계신 내 스승님은 일어서지 않으셨어. 그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이 수천 명의 박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거짓 교사들은 세상 사람들과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환호, 외적인 스펙, 세상적 인정(박수갈채)을 구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갔다. 내 인생의 유일한 평가자이자 청중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 그것이 바울이 고난 중에도 꺾이지 않고 사명을 감당한 비결이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해 본다.
아침묵상 영상으로 이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아래 YouTube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https://youtu.be/e0-i8AbKF0M